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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충북갤러리소회풍경노래
Artist' note

기억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과거의 장면으로 감정, 태도, 개념 등의 여러 상황을 포함한 경험이다. 자연풍경의 기억은 그때의 감정이나 현실 상황에 따라 실제의 풍경과 다르게 느껴지고 개인적인 사유로 인해 바라보는 시점 또한 다양해진다. 나에게도 개인적 사유의 눈을 통해 본 자연풍경에 대한 기억을 마음에 품고 있는 장면들이 있다. 그 소회한 풍경은 나의 회화작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나는 최근 몇 년 자연을 소재로 특히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풀들을 주관적 시점으로 재해석해 그리고 있다. 풀을 관찰하고 사진이나 드로잉으로 기록하기 위해 여러 번 풀밭을 찾곤 한다. 바람이나 햇빛 등 기후에 의한 풀들의 움직임은 바다의 파도, 강과 계곡의 물결을 연상케 한다. 화면에 구현된 풀밭은 실제 풍경과 그것에 대한 연상된 이미지를 중첩해 만들어진 상상의 공간이다. 그 공간을 그려내기 위해서 자연관찰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흐드러진 풀과 작은 꽃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은 앞서 말한 물결을 연상시켜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풀들의 리듬감은 화면에서 반복적인 크고 작은 선을 그어 표현했으며 그 풀밭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일상에서 다시 한번 소소한 즐거움이 되고 있다.

Exhibitions
1 / 14
기억산책
최양희, ‹기억산책›, 2023 162.2×130.3cm , Oil on canvas
2 / 14
담장
최양희, ‹담장›, 2023 130.3×97cm , Oil on canvas
3 / 14
봄바람
최양희, ‹봄바람›, 2023 36×72.7cm , Oil on canvas
4 / 14
산책
최양희, ‹산책›, 2023 72.7×90.9cm , Oil on canvas
5 / 14
산책
최양희, ‹산책›, 2023 130.3×97cm , Oil on canvas
6 / 14
언덕2
최양희, ‹언덕2›, 2019 72.7×36cm , Oil on canvas
7 / 14
제주
최양희, ‹제주›, 2023 45.5×60.6cm , Oil on canvas
8 / 14
푸른산책-1
최양희, ‹푸른산책-1›, 2023 72.7×53cm , Oil on canvas
9 / 14
푸른산책-2
최양희, ‹푸른산책-2›, 2023 72.7×53cm , Oil on canvas
10 / 14
푸른산책-3
최양희, ‹푸른산책-3›, 2023 72.7×53cm , Oil on canvas
11 / 14
풀꽃
최양희, ‹풀꽃›, 2023 72.7×36cm , Oil on canvas
12 / 14
풀꽆
최양희, ‹풀꽆›, 2023 100×72.7cm , Oil on canvas
13 / 14
하루
최양희, ‹하루›, 2023 60.6×60.6cm , Oil on canvas
14 / 14
허밍
최양희, ‹허밍›, 2023 72.7×90.9cm , Oil on canvas
Review

타자 혹은 관계로부터 들려오는 존재의 노래에 대하여

최양희 작가는 일상의 자연, 특별히 풀숲 풍경을 오랫동안 그려왔다. 작가가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오랜 시간 풀숲이 있는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은 기억 속에 풀숲이라는 장소가 어린 시절 자신이 뛰어 놀았던 장소였고 아직도 유희의 장소, 위안의 장소로 마음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풀숲을 소재로 작업을 하게 되면서 자주 자연의 풀숲 속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풀숲 자체를 유심히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매번 작가는 다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작가에게 이러한 경험은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를 추억하는 것을 넘어 복잡해진 현대 사회의 삶을 살아가며 잊혀지거나 상실하게 되었던 것들이 자신의 내면 가운데 점차 회복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고 정서적 안정감까지 갖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단지 풀숲을 바라보는 행위를 하였을 뿐인데 이러한 행위가 어린 시절의 시간 및 공간과 연결되도록 만들고 더 나아가 인간의 내면까지 변화하도록 만든 것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행위에 대하여, 그리고 바라보게 되는 대상이었던 자연의 풀숲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전시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일련의 작업을 해오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라본다는 행위가 어떻게 시간을 뛰어 넘어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함께 그 당시의 감각까지 소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인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재의 삶과 내면 세계까지 영향을 주게 된 상황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등 작업을 하게 되면서 작가에게는 많은 의문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작가는 과거 자신의 전시에서 몇 회에 걸쳐 ‘바라보다’라는 주제를 선택하여 전시를 진행하며 이를 고찰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에도 작가는 자신과 자연 사이에서 ‘바라보다’라는 행위를 실현해 보는 것, 즉 작업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풀숲의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현재 바라보고 있는 자연의 모습과 과거 어린 시절 바라보았던 자연의 모습을 연결하거나 바꾸어 보는 등 다양한 실험 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을 바라보는 행위를 화면 안에서는 그림을 그리기는 행위로 바꾸어 이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작가는 자아에 대하여, 그리고 이와 함께 그것의 대칭적 위치에 있는 자연에 대하여 알아가게 되었고 이 두 대칭 지점을 이어주는 기억과 이미지에 대해서도 더 깊이 고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 과정 가운데 어느 순간 바라보는 행위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작가에게 기억 속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과도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었기에 바라보는 행위라는 것은 그와 연관된 여러 감각들이 몸 안에서 자연스럽게 되살아나고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련의 신체적 프로세스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작가는 현재의 자연 속 풀숲을 바라볼 때마다 매번 어린 시절의 풀숲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가 함께 소환되는 경험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경험을 작가는 그의 작업에서 과거 기억 속 이미지와 현재 경험한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방식으로 번안해내기도 하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감각과 감각을 연결시켜 공감각적인 방식으로 바꾸어 표현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기억해낸다는 것, 그리고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은 서로 다른 영역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작가는 풀숲을 그려내는 행위이자 바라보는 행위와 관련된 일련의 작업 과정을 통해 무엇인가를 보고 감각하는 것과 그것을 몸 속에 기억하거나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가며 표현하는 것은 모두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이면서 시각적 감각과 관련된 행위라는 점에서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에게는 감각하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바라보는 행위이고 시각적 행위였던 것이며 감각 행위에서 시작된 시각 반응의 일부분일 뿐 아니라 이는 시각적 감각에서 파생된 행위이자 프로세스적 연장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양태가 서로 달라 보일 수 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본질상 같은 것으로서 보게 되는 측면에 따라 같은 내용의 다른 측면이 드러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이와 같이 바라보는 행위에 대하여 사유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현재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들, 지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지금 그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되도록 만드는 것들에 대해 점차 확인해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대해 직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최근의 기억으로부터 어린 시절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기억의 내용들에 대하여 캔버스 위에 그 전체를 복기하려는 듯이 세세히 그려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억에 새겨져 있던 감각의 지도를 완성하려는 듯 작가는 자신이 순간순간 경험하게 되는 감각의 내용을 회화적 방식으로 화면 전체에 넓게 펼쳐놓는 작업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작가는 이처럼 과거의 경험을 다시 현재의 경험 영역에 가져오고 과거의 기억을 다시 재생하여 살려내는 가운데 그 간극 사이를 고찰함으로써 그 결과 지금 현재의 시공간 속에 살아있는 실존적 존재로서 자아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작가가 이번 전시에 대해 ‘소회풍경노래’라는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특별히 은유적이며 복합적인 개념 안에 담아내고자 한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으리라고 본다. 작가가 제시한 주제를 풀어서 읽어본다면 ‘마음에 품은 풍경의 노래’로 정도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작가가 이처럼 색다른 표현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게 된 것은 작가에게는 일상에서 눈에 보이는 자연의 풍경들이 항상 몸 밖 외부에 있는 물리적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바라보거나 접하게 될 때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들이 안으로부터 솟아 올라오는 것 같은 독특한 느낌을 받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가 느끼게 되었던 것들은 단지 시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 표현된 내용을 살펴보면 마치 노래처럼 귀로 들릴 것 같은 표현이 담겨 있기도 하고 그 외에 촉각 등 다른 감각을 자극하는 공감각적 표현 등이 담겨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렇게 몸의 모든 감각을 일깨움으로써 오히려 내면에 담겨 있는 것들이 표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작가는 인간의 내부와 외부를 아우르는 총체적 감각에 대한 표현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중첩된 감각의 지점에 대해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작업을 해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와 상응하는 작업 방식을 작업에서 실험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회화적 기법들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 속도감 있는 페인팅 방식으로 자연을 표현하기 보다는 화면 전체를 오일 페인팅을 한 후 촘촘하게 세필과 같은 미세한 선 모양이 나오도록 화면을 긁어내듯 지워낸 후 다시 세필을 포함한 다양한 방식의 페인팅 작업으로 채워 나감으로써 기억 속 감각의 순간들을 매우 밀도 높은 층위의 공간으로 변환시키는 것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길게 늘어지고 화면 전체로 확장된 시간의 흐름 가운데 감각적으로 자신이 느껴왔던 것들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작가는 이처럼 그려내고, 지우고, 다시 그곳에 그려내고, 채워내는 무한 반복의 작업 과정에서 감각 가운데 무엇인가가 생성되고 해체되며 교환되는 것 같은 미묘한 경험을 수없이 느끼고 이를 표현하는 행위를 반복해 냄으로써 외부 세계를 바라보며 감각하거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이를 현재의 기억으로 다시 대체하는 것과 같은 시각적 인식 및 기억 작용, 그리고 감각의 표출 작용 등 자신의 작업 전반에 대해 통찰해 볼 수 있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를 무한 반복하는 가운데 시각적 감각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감각들 혹은 총체적인 감각의 실체에 대해서도 알아가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와 함께 작가가 작업을 해나가는 방법을 선택함에 있어 이처럼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캔버스와의 상호작용으로 변환하여 진행하게 된 부분 또한 특별히 주목하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작가의 기억 작용과 작가의 이미지 표현 방식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 및 의도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작가가 어린 시절 세상을 마주하여 바라보게 된 것 중 주요한 대상이 세계 속 많은 사물 중에서도 자연의 풀숲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된다. 풀숲의 이미지는 세계를 감각하고 알아가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고 그 어린 시절 당시에는 세계 전체이자 시각,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을 사로잡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성인이 되어 다시 자연의 풀숲을 거닐며 이를 감각하게 되었을 때 작가에게는 어린 시절의 단편적 시각적 기억이 아니라 그의 기억 전체와 모든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본다. 작가는 푸르른 풀숲의 풍경을 바라본 것이지만 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언젠가 증폭되어 바람이 일고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다가오는 느낌을 느낄 수도 있었던 것이며 이는 눈으로만이 아니라 피부에 닿는 감각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고 귀에 들리는 바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그 미세한 감각들을 담아낼 수 있는 흔적, 즉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 질감과 청각적 파동까지 담아낼 수 있는 흔적을 화폭 남길 수 있는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찾아내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가 페인팅 작업을 한 후 세필로 미세한 선을 긋듯이 화면을 세밀한 선 모양으로 지워내고 여기에 다시 미세한 선을 겹쳐서 채워 넣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기억과 내면세계 그 자체가 되었던 풀숲 이미지에 대한 감각, 즉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감각을 하나하나 불러냄으로써 이를 다시 감각하는 가운데 현 위치에서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자신의 감각 전체를 화면 위에 재생하고 이를 매개하는 질료적 영역들을 화면 안에 구축하여 이 경험을 스스로 기록해내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에게는 기억 속 자신의 감각을 불러낸다는 것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감각의 대상이 되어왔던 자연을 다시 마주하는 것과 같은 행위로 인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대상으로부터 감각하게 된 내용들, 다시 말해 감각 정보에 의해 형성된 자아에 대해 바라보는 행위가 되기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외부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에 의해 감각되는 정보로부터 형성된 자아라는 것은 그 개념적 구조를 볼 때 라캉의 거울단계 이미지의 개념으로부터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유아기 몸에 대한 파편화된 정보가 거울로 비춰질 때 전체로서의 이미지가 되어 다가오면서 타자적 이미지임에도 자아와 동일시되어 인식되듯이 작가에게는 어린 시절 ‘바라보기’를 통해 경험하게 된 자연의 풀숲 이미지는 전체로서 이미지이자 총체적 세계로서 다가왔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그 자체가 자아로 파악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상상계적 동일시 과정과 유사해 보이는 데 이를 작가의 작업에 적용하여 본다면 파편적 단계에서 대상과의 관계에서 타자적 이미지에 매혹되고 그 이미지에 동일시하게 됨으로써 내재화 된 이미지 즉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마음에 품은 풍경’이라는 것은 작가에게는 사실 자아를 발견하는 장소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캔버스와의 상호작용으로 변환하여 ‘기억’과 ‘망각’을 반복하는 것, 즉 작업 과정에서의 ‘그려냄’과 ‘지움’이라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 역시 타자적 이미지를 자아로 동일시하게 되면서 이로부터 발생하게 되는 현실과의 간극에 대한 대응을 한 것일 수 있다는 의미이며 이때 작가가 독특한 방식의 작업을 하게 된 것은 그것의 오류를 교정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마음에 품은 풍경’이라는 것은 타자적 이미지이지만 이 이미지를 바라보게 될 때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거울 이미지처럼 총체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이므로 이를 자아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이 이미지는 타자이자 자아로 인식하게 된 대상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이 총체성으로 인해 구조화되고 형식화된 언어적 프로세스 안으로 들어오게 된 체계가 상징계적 양상을 띠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마주하게 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행위, 즉 작가가 언어적 단계이자 상징계적 단계에서의 거울 이미지로 인해 오인된 자아와 관련하여 이를 각성하게 된 결과 이에 대한 교정 행위로 작동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는 거꾸로 보면 일련의 각성에 대한 반동적 행위, 즉 이전 단계에서의 무아(無我)적 황홀함의 경험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행위로서의 작업이 된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결국 화폭 위에는 작가가 어쩔 수 없이 이 대비되는 영역 가운데에서 두 간극 사이를 오가는 작업을 무한히 반복하게 된 흔적들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작가가 그려낸 풀숲과 같은 자연풍경 속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시간을 갖게 된다면 감각은 자연에 동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동화되어 변화된 감각을 갖게 된다면 도시화 된 현대 사회라는 곳은 상징계적 욕망의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곳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 역시 오랜 시간 동안 풀숲에 대한 작업을 하게 되면서 어린 시절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도록 만들었던 자연의 풀숲에 대해 회상하게 되면서 도시적인 현실의 삶에 대해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고 그로인해 어린 시절 자연의 이미지를 향유하였던 시간과 공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상상계적 환영의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이미 다가와 있는 상징계적 체계가 시간을 되돌려 놓을 수 없는 것이고 불가능한 일임을 이미 예시하고 있는 상황이겠지만 이렇게 현실(The Real)을 자각한 순간에도 작가는 지속적으로 화폭 위에 자연 속 풀숲을 그려낸 풍경을 거울삼아 그로부터 자아의 심층을 향해 되돌아가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아마도 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시도를 현실적인 어떤 수단을 사용하기 보다는 그의 작업 안에서는 대안적 방식, 다시 말해 노래로, 파동으로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감각적 차원 혹은 상상적 차원에서 다른 방식으로 성취해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그려낸 풀숲은 자연을 그대로 묘사한 것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파도처럼 보였던 것이고 노래처럼 들려왔던 것 같다. 작가는 수없이 많은 세필 작업으로 채움과 지움의 흔적들을 화면 전체에 펼쳐 놓음으로써 이 모두가 진동하는 울림이 되게 하고 파동이 되게 했고 작가가 경험했던 세계를 향하는 길을 이제 그의 작업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안내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바라보기’ 다시 말해 자연과 ‘관계하기’를 시작하게 됨으로써 이로 인해 울림과 파동과 같은 세계, 눈에 보이지 않던 에너지가 흘러가는 세계가 눈에 보이게 되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고, 귀로 들을 수 있게 되고 실재하는 무엇으로 감각하게 된다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마저 또 다른 차원의 환영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실존하는 존재로서, 또는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웠던 풍경을 불러오고 이를 현실의 영역에서 파동으로, 노래로 펼쳐 보임으로써 감각의 세계, 상상의 세계를 재차 화폭에 실현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득 채웠던 자연의 풀숲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자아 그 자체였기 때문이며 작가에게는 그곳이 자아를 만나는 기쁨의 장소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유희의 장소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위안의 장소, 치유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감각의 장소, 상상의 장소를 전시를 통하여 화폭 위에 그리고, 지우고, 세필로 채워 넣은 촉각적 흔적을 느낄 수 있게 함으로써, 그리고 이렇게 파동과 노래가 된 풍경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작업해 온 작품들을 매개로 하여 관객과 만나고 새롭게 관계를 맺음으로써 함께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함께 사유해 보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모든 시도는 불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작업을 통해 이러한 노력을 여전히 지속하고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존재적 한계로 인해 자아라는 것은 타자로부터, 존재라는 것은 관계로부터 규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작가는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회풍경노래는 그러한 작가의 인식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파동이자 물결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노래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 감각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이승훈 (미술비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