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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 기획전 충북청년작가전 《기도메타》 포스터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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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충북갤러리하반기 기획전 충북청년작가전 《기도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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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예술인을 위한 전시 공간인 충북갤러리는 지난 전시개막으로 충북 근·현대미술의 서막을 알리는 작고 예술인 8인을 통해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혁혁한 자취를 남긴 이들을 조명하여 충북미술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후 충북 작가들에 관한 관심과 지역의 미술이 아닌 작가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에 대한 기대심리가 높아지고 있다.

개막전시에 이어 충북문화재단은 충북갤러리 하반기 기획전으로 ≪충북 청년 작가 8인전(최규락, 황학삼, 신용재, 최재영, 이규선, 이은아, 노경민, 김승현) - ‘기도메타’ *기도메타 : Pray+Most Effective Tactic Available의 합성어. 신 또는 운에 모든 걸 맡기는 최후의 전략인‘밈(meme, 일종의 모방 가능한 문화요소)’을 뜻함
≫ 전시를 개최하여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청년 예술가들의 예술적 고민의 목소리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신神 또는 운運에 모든 걸 맡기는 최후의 전략을 뜻하는 ‘기도메타’라는 제하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예술과 삶, 생존의 치열한 줄다리기 속에서 모든 걸 작업에 걸고 노력하는 청년 작가들의 출구 없는 전략적 삶의 고단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청년 예술인에 대한 지원정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정작 청년 예술가로 살아남기에는 아직도 환경이 녹녹하지는 않다. 이런 가운데 ‘청년 예술인’이 단순 나이의 제한이 아니라 가장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는 시점으로 예술 활동의 청년화를 외치고 있는 작가들의 목소리가 현장에서 전해지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여러 관점에서 정리가 돼야 할 것 같다.

예술가로 살아가기
사람은 누구나 현재를 살아가며 현재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면서도 한편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의 결정에 따른 예술적 고행과 치열한 미술계 시스템 속에서 버텨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선배 예술인들이 걸어온 길을 보면 무엇보다 평생 굴곡진 역경을 감내하며 그들이 선택한 길을 운명처럼 헤치며 예술적 소신과 자긍심으로 작품활동을 해왔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수행을 기반으로 치열한 세상과의 관계 항속에서 저항과 타협, 소통을 위한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내야만 하는 간절한 그 무엇일 것이다.

이번 ≪충북 청년 작가 8인전 –기도메타≫은 일종의 8인의 자화상으로 아직은 예술적 성취를 위해 자신과 주변을 관찰하며 고민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왜, 예술을 해야 하는지’라는 물음으로부터 작업에 앞서 설레는 마음과 시시각각 변화의 모험을 시도하며 현재 진행형인 그들의 작업을 규정된 카테고리로 분류하기에는 쉽지 않지만 최소한의 영역으로 그들의 표현방식을 묶어보고자 했다. 본 전시를 통해 무엇보다 관객과의 소통의 기회를 넓히며 새로운 실험적 표현영역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기에 이들의 역량과 활동이 충북미술의 내일을 이끌 동력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hibitions
1 / 20
In the Room(Room N°13)
이은아, ‹In the Room(Room N°13)›, 2017 14'10"
2 / 20
N극, S극
최규락, ‹N극, S극›, 2023 180×85×3cm , seet zinc,oilpastel, korean paper
3 / 20
plastic world
김승현, ‹plastic world›, 2023 가변설치 , 오브제 집적
4 / 20
낙원
노경민, ‹낙원›, 2019 126.0×189.0㎝ , 장지에 수묵채색
5 / 20
도랑
이규선, ‹도랑›, 2022 182cm x 182cm , oil on canvas
6 / 20
등나무(Wisteria)
최재영, ‹등나무(Wisteria)›, 2022 227cm x 182cm , Oil on Canvas
7 / 20
무제
황학삼, ‹무제›, 2022 80x50x90cm , 시멘트
8 / 20
붉은나무
노경민, ‹붉은나무›, 2021 67.0×53.5㎝ , 장지에 수묵채색
9 / 20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최규락,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2023 180×85×3cm , polycarbonateboard,oilpastel, korean paper
10 / 20
산은 팔레트가 되고 하늘은 그림이 된다
신용재, ‹산은 팔레트가 되고 하늘은 그림이 된다›, 2022 227.4x488cm , Acrylic on wood panel , 소장처 : 개인소장
11 / 20
서 있는 사람들
황학삼, ‹서 있는 사람들›, 2020 60x45x190cm , 합성수지
12 / 20
아무것도 없다
이규선, ‹아무것도 없다›, 2023 61cm x 73cm , oil on canvas , 소장처 : 충청북도 도청
13 / 20
어디서 많이 본 듯
이규선, ‹어디서 많이 본 듯›, 2022 162cm x 162cm , oil on canvas
14 / 20
자연과 대화하기
신용재, ‹자연과 대화하기›, 2022 54.0x68.0cm , Acrylic on wood panel
15 / 20
지나갔으면 한다
이규선, ‹지나갔으면 한다›, 2022 182cm x 182cm , oil on canvas
16 / 20
퍼즐게임
최규락, ‹퍼즐게임›, 2023 180×85×3cm(5점) , polycarbonateboard,oilpastel, korean paper
17 / 20
플라타너스(Platanus Tree)
최재영, ‹플라타너스(Platanus Tree)›, 2022 227cm x 182cm , Oil on Canvas
18 / 20
하바나 모텔
노경민, ‹하바나 모텔›, 2018 148.0×98.0㎝ , 장지에 수묵채색
19 / 20
행복하세요
노경민, ‹행복하세요›, 2019 59.0×96.5㎝ , 장지에 수묵채색
20 / 20
화려한노동꾼
이규선, ‹화려한노동꾼›, 2021 130x160cm , oil on canvas
Review

기도메타, 두 갈래 여덟 개의 결

홍경한(미술평론가)


충북갤러리 기획전 주제인 ‘기도메타’(praymeta)는 인간 능력 밖의 일들을 믿음내지는 운(運)에 맡긴다는 뜻이다. 신이나 절대자 또는 신령 등에게 자신의 소원을 비는 행위인 ‘기도’(pray)와 게임에서의 효과적인 플레이 전략 및 전술을 뜻하는 ‘메타’(meta)의 합성어다. 전시계획서상에서 역시 ‘신 또는 운에 모든 걸 맡기는 최후의 전략’으로 정의하고 있다.
모든 노력을 다했으니 이젠 마지막 전략으로 기도 밖에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해당 기획전의 주제 기저엔 불확실성에 대한 절박함이 녹아 있다. 예술을 매개로 ‘나’와 세상에 대한 경험의 감정적 깊이, 서사를 포착할 수 있도록 한 환기적 장치로도 사용됐다.
두 개의 섹션 자아에 대한 고민과 내적 욕망의 표현 (이규선, 노경민, 이은아, 신용재), 인간의 심리적 불안과 해학의 서사적 표현(최규락, 황학삼, 최재영, 김승현)
으로 나눠진 이번 전시에선 작가 여덟 명 개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동시대인들의 외적 독백을 공유할 수 있다. 동시에 절망에 직면한 존재들의 삶, 그 단면들 단면엔 어느 직업 못지않게 열심히 작업하고 살아가지만 갈수록 고립되는 느낌, 잃어가는 방향, 세상과 단절되는 여운, 아무리 노력해도 당장 내일조차 알 수 없는 불안한 예술가들의 현실도 반영되어 있다.
과도 만날 수 있다. 공통적으로 기도와 운에 맡길 수박에 없는, 절망 속에 사는 사람들이 직면한 동시대인들의 내적 혼란을 상징과 은유로 담았다.
실제로 충북문화재단 기획전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은 자신의 기억과 경험 등을 바탕으로 하지만 보편적 인간 삶과 무관하지 않다. 다양한 감정들과 씨름하는 개인들이 처한 도전과 좌절, 상처에 대한 인식을 실존에 투사하여 보여준다. 또한 인간 조건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어두운 면들을 조명하면서 공동체 앞에 놓인 사회적 문제들을 자신만의 내레이션을 통해 드러낸다.

자아에 대한 고민과 내적 욕망의 표현
작가 이규선은 의식되어 나타나는 지속으로서의 삶과 상황을 현실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감정을 다룬다. 그림 속 주체는 생기를 잃은 듯 건조하며, 자신의 생활 반경 내의 일상은 특별할 게 없다. 대신 그의 캔버스엔 삶에 관한 생각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적어도 작품이 드러내는 삶은 인지적-지각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자,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관을 관통한다. 을씨년스러운 작업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자화상이 등장하는 <페이드 인>(fade-in, 2016)과 <페이드 아웃>(fade_out, 2016), 그리고 <곰빵>(2018), <화려한 노동꾼>(2021), <지나갔으면 한다>(2022)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업은 화자는 유형과 무형의 끝이 맞닿아 경계를 정하지 않는다. ‘나’를 축으로 한 되풀이 되는 삶의 노정을 평범한 풍경 사이에 위치시키지만, 우리의 삶이 저마다의 장면들을 끌어안은 채 순환-반복되고 있음 역시 일러준다. 그건 매우 모두 일상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감정이 우선한다는 게 특징이다.
작가 노경민의 작품은 물리적 공간과 실존적 관계를 붉은 화면에 담아낸다.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 일상이 유발하는 스펙트럼이 신체와 정신 내에 누적되고 쌓여 흩어지는 과정 내 형성된 흔적들이 산포되어 있다.
그의 작업은 애써 그럴싸하게 치장하거나 꾸민 자국이 덜하다. 밀폐된 곳에서 느끼는 막막함, 절망을 대하는 사람들의 원초적인 감정이 있다. 그건 무력감내지는 헛헛함, 결핍과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고독>(2023), <아무도 없는>(2021), <낙원>(2019) 등의 몇몇 작품에선 짙은 쓸쓸함이, 일부에선 거친 황량함이 엿보인다. 작가의 말마따나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의 처연함과 쓸쓸함”은 확연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면 내 부유하는 실재와 망각 간 갈등이다. 그것은 존재이기에 체감하는 생의 단상들, 경험의 산물들이다. 그리고 그 산물들은 돌고 돌아 아련한 공감을 선사한다. 우리 누구나 애달픈 조각 하나씩은 갖고 살기에, 그렇게 세월에 익어가기에.
작가 이은아의 영상작업은 관계의 기록이다. 내부엔 ‘사건’이 있다. 그것은 직조된 가운데 개간되며, 거부할 수 없는, 소소하거나 중대한 시나리오를 읊는 배우처럼 나와 관계된 시간의 층을 세트 내에 존치시키듯 묘사한다. 그리곤 역설적이게도 세트 내에서 순환, 반복하는 삶은 숙주인 원형을 이탈하지 못하며, 한편의 드라마로 기록된다. 그의 작가노트에는 “나에게 있어 기록은 낯선 곳에서 자신의 존재와 안전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를 바탕으로 삶을 소화하고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를 이해한다.”고 적혀있다. “장소, 상황, 공기, 냄새 그리고 그날의 전화 통화 등 그때가 지나면 사라지는 순간의 조각들을 꿰맨다. 작업을 함에 있어 나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작가가 작품과 맺는 관계에 대한 정당성이다. 작가 자신이 그 작업 안에 충분히 담겨 있는가? 이것은 진실인가? 라고 자문할 때 나는 결국 나의 이야기를 담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업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있음은 보는 이들의 몫이다.”고도 썼다.

시청각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은 “사적인 내용이 타인의 기억과 경험에 기대어 공감되기까지의 과정이 있어야만 하는”(이은아) 것이지만 그자체로 다면적인 관계의 장소라는데 의미가 있다. 특별한 지점은 이은아의 작품들의 경우 작품자체가 발화점으로 존립하지만, 보는 이들 각각의 조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체 환경에 의해 구현되는 ‘의식의 조각’으로, 의식의 조각은 작가 자신이 집중해온 의제를 예술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재구성하고 보편적 ‘관계망’으로 전치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작가 신용재는 습관적으로 바라본 하늘과 자신의 삶을 묶어낸다. 야외 작업을 주로 하는 그는 무시로 변화하는 자연을 그리며 삶의 유효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곳엔 예술가로서 존재와 그림의 의미에 대한 고민도 녹아 있다. 인연, 상실, 그리움이 집적된 공간이 그에겐 곧 하늘이다. 그에겐 그 어떤 것보다 위로가 되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엔 어떤 환상이 들어 있지 않다. 생명체와 자연의 빛, 구름 등이 직관적으로 표현된 일단의 작품들은 어쩌면 환상을 단념하도록 요구하며, 대상과 감정의 보합은 오히려 환상을 필요로 하는 현실을 단념토록 만든다.
부각되는 건 감정이다. 그리고 현실에 관한 감정적 삽입은 합판을 깎아내고 다듬는 매체 변화적 태도까지 읽을 수 있는 <산은 팔레트가 되고 하늘은 그림이 된다>(2022) 등의 작업에서 보다 두드러진다.

인간의 심리적 불안과 해학의 서사적 표현
작가 최규락은 자신이 경험한 사회와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풍자의 방식으로 풀어내왔다. 범주는 넓다. 정치, 예술, 대중문화를 아우른다. 그렇다고 극적으로 신랄하거나 이념적 편향성을 띠진 않는다. 사회부정적·비판적 작업에서 쉽게 열람되는 진지함 혹은 근엄함, 무게감도 쏙 뺐다. 그래서 해학에 가깝다.
최근 작업은 풍자의 결에서 벗어나 있다. <평화시장 비둘기>(2023)나, <달아 달아 밝은 달아>(2023) 등의 작품은 이전의 익살스러운 풍자와는 달리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대상을 감싸 안으려는 여운이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삶에 대한 진지함을 배경으로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기 보다는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건강한 삶의 의지와 갈음된다.
근작과 구작 간 차이라면 우리의 진짜 삶, 좀 더 대상에 충실하게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론 유명 정치인과 예술인 등이 등장하던 이전의 시리즈 보다 낫다.
작가 황학삼은 당대 직면한 불안한 상황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대 인간의 삶을, 그리고 다양한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현실을 ‘몸통만 남은 존재’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몸과 얼굴을 만들고 또 뜯어내기를 반복하면서 얼굴의 표정을 만들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복잡하고 변화되는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어떠한 것도 규정짓지 못하는 생각과 감정들을 표정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작가노트에 썼다.
로 다룬다. 팔을 가지런히 한 채 홀로 또는 군중으로 배치된 몸은 극도의 불안을 내재한 조각이면서 ‘삶과 존재’의 관점에서의 기술(記述)이다.
그의 몸은 곧 삶의 덩어리이자 불안을 기억하는 몸이다. 세상에 놓인 무언가를 삼키지 못한 뭉치들이다. 하지만 그의 신체는 살며 살다 간 혹은 이미 ‘살아낸 자들’의 함구된 다언(多言)이다. 그런데 그 말들이 참으로 텁텁하면서도 아리다. 인간사 이유 없는 삶 없듯, 무수한 사연을 간직한 몸이기 때문이다.
황학삼의 작품은 언어를 규정하는 표정의 ‘거세’로부터 출발하나, 온전히 개인의 영역은 아니다. 동시대 인간들의 심적인 부분과도 연관이 깊다. 알 수 없는 공허감 혹은 무언가가 응결(凝結)되어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의 실체도 형상 너머에 부유하는 심적 내재율(內在律) 내재율은 잠재적 운율로, 겉으로 명확히 드러나진 않으나 은근히 느낄 수 있는 운율을 말한다.
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구토》나 《존재와 무》에서 마냥 인간에게 있어 존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의 연장으로 풀이할 수 있다.
최재영 작가의 메마른 식물(식물이 있는 풍경)에선 비의도성 뚜렷한 붓질의 투박함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거침없는 붓질이 두드러지고, 물감을 쌓고 뿌리고 긁어내는 행위와 그로 인한 질감이 돋보이는 화면은 눈과 사물, 재현으로써의 기록과 인식으로써의 기록을 뒤로 밀어낸다.
근작은 ‘그리다’가 아닌 ‘표현’에 가치를 둠으로서 회화의 맛이 한층 강화되고 있다. 이는 “설명적 이미지의 재현에 많은 피로감을 느낀”(최재영) 나머지 자신과 자의식의 미결정성에 따른 변화의 결과다.
변화는 주체(나)가 주체일 수 있는 욕망, 또 다른 주체인 동시에 자아가 다른 주체와 관계 맺도록 매개하는 상징적 대타자의 옹립을 허락하는 또 다른 욕망의 변주까지 읽게 한다. 특히 <조팝나무>(2023) 시리즈와 (2023) 연작 등을 포함한 풍경은 중첩과 시공의 결에 의해 더 이상 원래의 것이 구별되지 않는 영역 속에서 새롭게 존재하고, 오랜 시간 쌓인 작가의 붓질이 재현을 넘어 작가의 감각적 체험이 만들어낸 시공의 콜라주임을 가리킨다. 여기엔 ‘물감을 바르고 걷어내고를 반복’하는 과정에서의 다차원적인 시간성이 배어 있다. 그는 현재 회화가 ‘스스로 예술화’되는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김승현 작가는 ‘위장’이라는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다고 했다. 작가노트에 그리 쓰여 있다. <가려진 나, 가리는 camouflaged>(2019), (2017) 등의 작품을 말하는 듯하다.
그러던 중 회의를 느꼈고, 이후 오브제에 집중하는 작업으로 전환했다. 즉, 그동안은 “위장이라는 주제를 통해 숨기고 가리고 피하려는 작가 자신을 표현했다면, 이제는 그 대상과 내가 바로 마주하고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작가는 틀에 박힌 것에서 벗어나 ‘변화’를 갈망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무엇이든 시도하고 도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2023)이다. 꽃으로 만든 거대한 원형으로 먼지를 털어 낼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 이어져 꽂히는 형상의 작품이다.
천장에 플라스틱 빗자루를 늘어놓은 (2022)도 같은 맥락이다. 꽃 덩어리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매달려 있다. 직선인 ‘빗자루로 원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작은 의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상의 하찮은(?) 존재를 선택한 뒤 의미를, 생명력을 부여했다. 당연히 사물의 본래용도는 폐기되고 의미 또한 달라졌다.
이든 던, 이들 작품에선 특정한 메시지는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낯선 우아함>(2021) 시리즈와 (2021) 연작도 마찬가지다. 조형적 실험에 집중된 듯한 느낌이다. 일상의 흔한 사물이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특별한 위치로 자리이동을 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낯섦과 생경함을 선사하고자 한 것도 그 연장이랄 수 있다. 해석은 보는 이들의 몫이다.
무언가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술가로서 바람직한 태도다. 작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예술가는 늘 ‘예술의 이유’를 물어야 한다. 젊은 작가들 중엔 약간의 인기가 있다하여 주구장창 똑같은 작품을 복제하며 ‘스타일’이라고 우기지만, 실은 창의성 부족이요 현실과의 타협이다. 당대성을 반영한 ‘혼돈의 실험실’(하랄트 제만: Harald Szeemann)이 예술이다.
“‘모든 것이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가다’라는 어떤 작가의 말을 나는 참 좋아한다.”는 말도 덧댔다. 백남준이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원조는 요셉보이스Joseph Beuys다. 김승현과 보이스의 말마따나 우리 주변의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요셉보이스는 이런 말도 했다. “예술은 현실의 혁명적인 원동력인 동시에 모든 사회적 행위의 근간이다.” ‘사회적 조각’(변화를 위한 조각, social sculpture)을 언급하며 사용했다. 예술은 민주적 사회를 위한 봉헌이자, 인간적인 조각(따뜻한 조각), 올바른 방향을 위한 조각(사고적 조각)의 일부다. 삶을 보다 인간적 사회로 변화시키는 게 예술이라고 한 셈이다. 결국 김승현은 자신의 조각·설치(예술이)가 어떤 방향으로 귀결되어야만 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그가 추구하고 있는 변화의 소실점, 그 끝엔 무엇이 있는지 말이다.

미술을 통한 타자의 존재와 의미
여덟 명의 작가가 참여한 ‘기도메타’ 전은 크게 두 갈래에 놓이지만 예술가마다 각각의 나침반을 갖고 있다. 기획자의 입장에선 구획을 나누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또 어떤 것은 제대로 기능한다는 차이는 있으나 저마다 일정한 자침(磁針)을 소유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번 전시에선 그 나침반이 지시하는 곳을 응시하는 것도 전시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들의 작업을 통한 타자의 존재와 의미를 고민해본다는 것에 방점을 둔다. 그림 속에서 유랑하며 살아가는 작가들의 시선 끝에서 작성된 사회를 재발견하는 것도 기획의 흥미로움이다.
작가들은 때론 신화화된 주체를 제거하며 소외되고 억눌렸던 비주체들을 여러 매체 위로 떠올리는 방식으로 그 시선을 보여준다. ‘나’라는 화두를 배척하진 않으나 대체적으로 대상을 빨아들이고 종속시키는 것을 배격하며 존재자의 위치를 탈각시켜 주변을 병렬적-평활한 관계로 옹립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전체 속에서 개별을 말하고, 개별 속에서 전체를 가늠한다.
이번 기획이 지닌 또 하나의 의의는 시각 너머 자기중심적 인간 본성의 재고와 타 존재에 대한 고찰, 미래 예술을 향한 갈망을 넘어 우리를 다시 현존의 인간으로 되돌리려는 작가들의 고민을 목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당대성이 약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예술의 존재이유와 목적에 관한 고민이 유효하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나아가 이번 전시가 다양한 미적 가치관이 대중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대화하는 장(場)이라는 점 역시 인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