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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지음(山水知音)에서 속리탄금(俗離彈琴)으로 포스터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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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충북갤러리산수지음(山水知音)에서 속리탄금(俗離彈琴)으로
Artist' note

산수지음(山水知音)
<묵산수>는 대상을 그 자체로서는 절대 제시 할 수 없는, 무한의 상상력이 동원 되는 세계라는 것을 대부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원초적으로 느껴지는 것들 즉 숨결, 절대적 고독, 절규의 슬픔 같은 것들을 맛보며 때로 정적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市隱의 시간들을 태워 가슴에만 들려오는 저 소리들을 시각적 느낌으로 내어 보고자 한 작품 들이다.


속리탄금(俗離彈琴)
지구촌 인류 모두가 코로나로 인해 커다란 경각의 수렁을 경험한 후, 찬란한 희망의 노래 부르기를 주저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탄생한 작품들이다.

About

산수지음(山水知音)에서 속리탄금(俗離彈琴)까지 권갑칠 작가의 작업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한국화 개인전

Exhibitions
1 / 5
蕙苑愛1
권갑칠, ‹蕙苑愛1›, 2023 61x61cm , 지본소묵담채
2 / 5
蕙苑愛3
권갑칠, ‹蕙苑愛3›, 2023 61x61cm , 지본소묵담채
3 / 5
蕙苑愛5
권갑칠, ‹蕙苑愛5›, 2023 61x61cm , 지본소묵담채
4 / 5
레위시아코틸레돈
권갑칠, ‹레위시아코틸레돈›, 2023 162.5x66cm , 지본소묵담채
5 / 5
해탈의문
권갑칠, ‹해탈의문›, 2023 162.5x66cm , 지본소묵담채
Review

蕙苑 권갑칠 작가의 한국화
- 山水 · 蕙 苑 愛 –

글. ART89 김경숙

自然 ·山水
蕙苑 권갑칠 작가는 2012년 작은 부스展에서 처음 만났다. 그림을 구경하는 중, 가을을 닮은 노란색과 투명한 푸른색이 한지에 번진, 걸개 그림이 눈에 띄었다. 그 이후 작가의 작업이 수묵화, 수묵 담채화 그리고 소재의 변화 등 다양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통 한국화에서 시작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내 작품의 대상은 언제나 자연이었다. 산은 어질고 물은 지혜롭다(작가)`
작가에게 있어 자연은 고향이며, 창작 행위를 가능케 해 주는 것이다.

동양적 사고에서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만물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따르는 것이다. 서로 대립하는 것(有, 無)은 무한히 상호 전환된다. 無에서 有로, 有에서 無로.
자연은 현실 너머에 뜻과 정신을 두었으며, 현실적 삶과 연결시키려는 일원론적에 있다. 우리나라는 불교, 유학의 성리학 등 중국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중국의 사상은 선가(仙家), 유가(儒家) 아래 각각 전개되었고, 양자가 취하는 것은 ‘자연으로의 회귀(回歸)’이다.
서양은 인간 중심의 가치관이 자연보다 먼저였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와서야 자연주의 정신이 태동하였다.

‘다만 저 大 自然의 謹嚴한 氣運 앞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잊었었다(작가)` 작가에게 있어 자연은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것이다.

氣運生動
‘형태가 없는 태허가 기의 본체이고, 그것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일시적 변화의 형태일 뿐이다. 太虛無形 氣之本體, 其聚其散 變化之客形(正蒙, 太和)`

중국 오대 산수화가인 형호(910-950)는 ‘필법기(筆法記)`나 ‘화산수결(畵山水訣)`에서 회화의 여섯 가지 요소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첫째는 기(氣), 둘째는 운(韻), 셋째는 사(思), 넷째는 경(景), 다섯째는 필(筆), 여섯째는 묵(墨) 이다. 이 요소들은 내면적인 기(氣)로 시작한다고 한다.
‘氣`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연결되어 있는데, 유교의 세계관인 성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늘의 기운과 연결된 땅의 지기(地氣)는 음(陰, 어둠), 양(陽, 밝음)이 있으며, 둘은 상호보완 되어 만물을 생성시켜 조화와 균형을 갖춘다.

작가가 작업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기운생동(氣運生動)` 이었다. 동양의 역대 화론가(畵論家)들도 그림의 첫째 조건으로 기운생동을 꼽았다. 기운생동은 기(氣)가 막힘없이 흘러 그림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생함`이다.
‘고개지`의 ‘以形寫神`이란 말이 있다. 형태를 통해 神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형태를 통해 神을 표현하더라도 실제로 대면한 것 같은 ‘생생함’ 이 없으면 神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먹의 농담 만으로 기운생동을 느낄 수 있다. 그 쓰임을 어떻게 운용하는가에 따라 그림의 생동감이 달라진다.
수묵은 물과 먹으로 그린 그림이다. 무채색 계열인 검정색과는 색에서 동일하지만, 동양의 먹은 관념적이고 물성적인 것이다. 먹의 농담, 건습 등의 표현으로 사물을 나타낸다. 농담의 변화는 색의 다양함을 나타내는데, ‘묵채(墨彩)`를 뜻한다.

발묵법(潑墨法)과 적묵법은 먹을 피어나게도 하고, 층층이 깊게 스며 들게도 한다. 작가는 한없이 침잠(沈潛)해 들어가는 스며듦을 유독, 산에 두고 있다. 산의 전체적인 윤곽은 드러내지 않고 일부만 드러낸 체, 눈 바로 앞에서 다채로운 먹의 운용(運用)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산을 ‘어머니 품 속 같다`고 했다. 산에는 나무와 풀, 온갖 생명들이 사는 신비로운 힘이 깃들여져 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작품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동양 문화권에서 먹을 ‘현색(玄色)`이라 하여 빛이 없어도 존재하는, 우주의 기운을 담은 상징적인 색으로 생각했다. 인간과의 교감을 ‘먹’을 통해 연결시켰다.

‘원초적으로 느껴지는 것들, 숨결, 절대적 고독, 절규의 슬픔들을 맛보며 정적 속에 가두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자 무던히도 애쓰는데…. ` 작가의 고백이다.
그림에는 작가 자신을 깊숙이 가두고 있지만, 또다른 세계를 기다리는 마음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짙은 먹색의 산등성이 저 멀리, 원경(遠景)에 흐릿한 산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짙은 먹색과는 달리 여백(百)이 前景에 놓이게 되면, 첫 걸음을 내딛기 위한 길로 보이기도 한다. 黑이 길이 되기도 하고, 白이 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黑과 白이 서로를 보듬고 있기도 한다.

한국화에 있어 스며듦과 깊음, 이것은 먹과 종이 그리고 작가가 하나됨을 뜻한다.
작가는 여러 종이의 특성과 성질은 ‘작가의 감각으로 만져보아야 한다.’고 했다. 종이의 선정은 작가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종이를 찾아 전국을 다녔다.
참고로, 종이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화선지(畵宣紙)는 선지(宣紙)의 하나로 옥판 선지보다 질이 조금 낮지만 조금 크기가 큰 것을 이르는 것이다. 예전 선조들이 사용하던 화선지를 한지라고 한다. 일반 화선지보다 닥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運筆 · 一劃
작가는 어릴 적, 유교 가풍의 집안에서 자랐다. 그의 곁에는 항상 먹과 종이 그리고 붓이 있어 자연스레 한국화를 그리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길을 가고 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는 호흡을 길게 하여 기운을 모은다고 했다. 그런 다음 붓은 거침없이, 호흡이 멈춘 듯, 畵면 위로 단숨에 움직여 나간다. 운필(運筆)의 신묘(神妙)함이다.

그림과 글씨(서예)의 선은 같으며, 점이 선이 되고 면이 된다. 선은 ‘긋는다` 이지만, 면은 ‘칠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筆선이 요구되는 동양의 붓은 신체 일부가 되고, 체화(體化)되어 작가의 기운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강하고 약하고, 길고 짧고, 가고 멈추고, 거칠고 부드럽고…. 서예의 용필법(用筆法)은 그림의 선과 유사하다. 육조시대 육탐미는 초서체의 기법을 회화 안에 운용하여 끊김없이 이어지는 ‘일획론’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형성하였다.
화(畵)는 획(劃)이니 화(畵)의 일자(一子)로 표현된다. 흔히 우리가 쓰는 말 중에 ‘한 획을 그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때의 ‘한 획’은 어떤 범위나 시기를 경계 짓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한 획은 경계에 들어가기 위한 에너지(氣)의 큰 파동이다.

일획(一劃)을 중요시하는 동양화는 서(書)와 그 정신을 같이한다(書畵一致). 시화(詩畵) 일치는 ‘시화본일률(詩畵本一律)`이라 하는데, 문인화론의 핵심이 되고, 지향 목표였다. 그리하여 작가는 서예와 더불어 한서, 한시미학까지 여기(餘技)로 탐독했다.

‘조송식`의 글에 일획을 언급한 내용이 있다.
‘대대례(大戴禮)에는 양의 정묘한 기운을 신이라 하고, 음의 정묘한 기운을 영이라 한다. 陽之精 氣曰神, 陰之精氣曰靈. 신은 양의 정기이고, 영은 음의 정기이다. 따라서 일획은, 생명력을 전달하는 양의 기운인 神으로 우주의 원초적 상태를 체득(受)하여, 형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음의 기운인 靈으로 나뉜다.`

視點 · 彩色
먹색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작가의 山水 그림이 있다. 산의 준(皴)이 수많은 미점묘(米點妙)로 들어가고, 적묵으로 먹이 진하게 스며 있으며, 빠른 필치로 생동감 있게 나뭇가지를 나타내고 있다. 산세의 강한 먹기운이 다시 산의 내부로 들어가 거대한 골격을 드러내고, 기맥상통과 상호 조응으로 대담하게 표현된 산등성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하강하여 달리며, 그 아래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먹색의 기운이 강하지만, 의외의 반전이 있다. 산 아래에 있는 강물에 맑은 옥색을 넣어 버린 것이다. 강한 기운의 화면이 색으로 인해 생기 있고 부드러워졌다. 기운이 한 곳에만 머물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순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빛은 직진하고, 인간의 눈은 빛을 모으는 역할을 한다. 사물에서 멀어지면 화면에서 작게 보이고, 가까우면 크게 보인다. 서양의 선원근법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계산했다.
작가의 그림에서는 수치적으로 계산된 그림이 아니다. 자연의 기운을 담기 위해, 필요한대로 구도를 잡고 있다.

‘바탕을 이룬 이후에 그림(채색)을 그린다’는 논어의 ‘八佾`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이다. 墨이 기운생동의 문제를 주로 다루려고 한다면 채색은 전통 육법(六法)인 수류부채(隨類賦彩)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수류부채는 중국 남제(南齊)의 화가 사혁(謝赫)이 ‘고화품록(古畵品錄)`에서 설명한 육법(六法)의 하나이다. 대상(對象)의 질과 뜻을 잘 알고 색채를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사물의 종류에 따라 색채를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墨은 보이는 세계 그 이면에 어떤 미지의 힘과 세계를 나타내는 우주의 기운을 보여 준다면, 채색은 보이는 세계(세속)의 기운을 보여준다. 이 둘의 기운은 치우침이 없다.

현대미술 · 한국화의 現代化
한국화는 전통적인 기법과 형식에 따라 그려 온 것을 총칭하는 것이다. 채색의 고분벽화, 고려의 화려한 불화, 조선시대 문인화, 수묵화, 민화 등 시대의 문화와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선원근법과 음영법으로 대변되는 서양화법은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 숙종기에 수용되었다. 그 후 초상화와 행사도, 기록화 등 시각적 사실감을 주기 위해 활용되었다. 서양화의 근대적인 시각체계는 인간의 시점으로 세계를 재현한 것이다. 개화기 이후 사조로서 서양화가 수용되었다.
한국적 모더니즘은 1940년 해방 전후를 거쳐 1950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한국화의 시류(時流)적 재편성은, 한국화의 정신적 의미나 뜻이 이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오랜 시간 작가는 한국화의 전형적인 법칙들을 수련하였다. 하지만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자율적이고, 활달한 에너지를 그 법칙들은 다 채워주지 못했다.

작가 작업실에 현대미술을 간단히 정리한 쪽지가 붙어 있었다.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노력한 흔적이다.
- 자기 조형언어, 색의 독립, 자유, 원근법에서 해방(평면성), 관념, 개념 도입, 추상성 획득

이 메모에 대해 좀더 설명해 보기로 한다.
·조형언어란? 조형을 매개로 의미, 뜻, 정서 등을 전달하는 수단, 방법, 체계이다. 전달하는 수단으로 조형요소가 필요한데 이 요소들은 주관적인 해석(느낌, 이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색은 작가의 자유 의지를 반영한다.
·서구적 합리주의의 흐름 속에서, 원근법은 실제적 관찰에 의해 ‘보는 것’에 바탕을 두는데 반해, 평면성은 ‘보고 싶은 대로’ 사물을 바라본다.
·관념은 어떤 견해나 생각인데, 개념은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요소를 종합하여 얻는다.
·추상성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이미 전통 한국화에는 서예적인 추상성을 발견할 수 있다. 덧붙여 서양의 추상미술은, 동양의 天(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과 의미가 다르다. 초기 추상 미술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배격하는 정신세계를 탐구했다. 또한 20세기 초, 미래주의, 구성주의 등 급격히 발전한 과학을 찬미하기도 했다.

‘현대 한국화’의 모색을 위해 현대미술의 다양한 양식을 살펴보자.
현대미술은 19세기 중반 서구사회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산업화, 도시화의 변화 속에 나타났다. 20세기 전반부의 미술은 원시주의의 관심, 무의식의 탐구 등 특정한 주제를 다양한 양식으로 표현하였으며, 미술가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을 요구했다.
원색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난, 야수파, 고유색에서 벗어난 인상파, 고흐의 강렬한 색과 붓놀림들은 색채의 자율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피카소의 다(복수)시점과 형태의 파괴, 구성주의의 기능적인 미, 수적 아름다움의 순수주의, 비합리성을 추구한 다다, 팝 아트, 미니멀 아트,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이 있다.
현대미술은 과거 조형적인 전통(색채와 형태)인 것으로부터의 탈피, 오브제의 부각, 미술과 테크놀로지와의 관계성 등을 제공하였다. 이를 살펴보고, 전통과 현대 사이에 있는, 지금의 ‘현대 한국화`는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한국화`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창작의 방법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하겠다.
‘금강경`에 뗏목(筏)의 비유가 있다. 길을 가던 어떤 나그네가 이쪽 언덕은 무섭고 위험하고, 저쪽 언덕은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큰 강을 건너기 위해 풀, 나뭇가지, 잎을 엮어 뗏목을 만들었다. 강을 건너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다시 길을 가기 위해서는 뗏목을 지고 갈 수가 없다. 뗏목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강을 건넌 후, 뗏목은 버려라`는 우리가 가는 길(본질…)에 버려야 할 ‘무거운 짐`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권갑칠 작가가 ‘현대’라는 단어에 염두에 두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라는 단어는 역사학적으로는 시대의 구분을 가리킨다. 문화의 차이를 서양에서는 시대적으로 구분하였지만, 동양 중국에서는 사상, 유파와의 차이로 구분하였다.

‘又玄 고유섭`은 현대美와 관련된 사상, 지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현대미가 잃은 것은 사상성(思想性)이요, 얻은 것은 지성(知性)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상이란 것은, 지성이 <고립된 지성>으로 있음으로써 사상이 되지 못하고 그 무엇에, 즉 한 표상(表象) 즉 의미적 존재라야 하고, 겸하여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체망적(體網的)인 것을 요한다. 현대미에서는 지성은 체망적으로 전개되고 설복적(說伏的)이 되기를 거부한다.`
사상은 의미 있고 끈기가 있는 것이라면, 현대미의 지성은 원소 그대로 빛날 따름이다.

예전에는 상상만으로 존재하였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방대한 데이터로 사람을 대신하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인간의 섬세한(뜨거운) 감정을 담아내는 예술을, 인공지능이 할 수 있을까? 현재로는 없다고 본다.

세계의 문화 예술은 빠르게 소통되고, 국제화되었다. ‘한국화`의 정의를 찾아보면, 한국의 전통적 재료와 양식 및 기법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먹과 밖으로 드러내는 색. 그에 따르는 기법만으로 ‘한국화` 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우리(한국)의 풍토(風土)와 그 기운이 더해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산악국(山岳國)이다. 산이 있으면 물이 있고, 바람이 있다. 그 산 아래 우리들은 숨 쉬고 살아간다.

‘현대 한국화`라는 명칭은, ‘현대미술 속에 한국화(장르 구분)인가?` 아니면 지금 이 시대에 맞는‘현대적인 한국화’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화’ 라고 부를 수 있고,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을 첫번째로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현대적인 한국화`라면,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로운 창작을 모색하는 ‘한국화의 현대화(現代化)`가 되어야 한다.
‘具古以化`는 ‘전통을 몸에 갖추되 새롭게 하다’이다. 여기에서 化는 한자의 變과 대비된다. 變이 ‘change`라면, 化는 ‘transformation`이다. 化는 완전한 재창조이다.

空氣 · 音
권갑칠 작가는 현대 한국화를 ‘모던 클래식`이라 칭했는데, 모던과 현대의 융합이 필요하다고 했다. 융합은 예술에서 조화(調和) 또는 융화(融化)의 표현 방법으로 나타난다.

2022년에 발표한 ‘山水知音`展, 그리고 ‘모던 클래식` 모두 ‘音`과 관련 지어 표현하였다. ‘音`은 소리이며, 음악이다. 인간의 오감 중 시각은 빛을 통해, 청각은 공기 중의 파장을 통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받아들인 정보로 각각의 오감들은 다양한 감각을 경험한다.
산수(시각)를 통해 ‘音`을 느끼는 것이다. 즉 산수의 ‘音’은 보이지 않지만, 새, 바람, 나무, 바위…. 의 소리를 느끼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아침저녁 제법 쌀쌀하다. 공기가 달라졌다…. 가을이다.
2023년 11월 가을날, 蕙苑 권갑칠 작가의 전시가 열린다. 전시 주제는 ‘속리탄금과 蕙苑愛` 이다.

작가의 작품(蕙苑愛)을 살펴보자.
‘레위시아코틸레돈`. 이 작품의 의미는 ‘치유의 신’이라고 한다. 하얀 흰 천을 머리에 쓰고, 정면으로 서 있는 인물이 있다. 두 손에는 한아름 꽃다발을 들고 있다. 얼굴은 채색되어 있으며,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선으로만 처리되어 있다. 인물의 정면 구도는 형태를 명확하게 잡아주고, 얼굴의 채색은 인물의 표정을 읽게 해 준다. 그리고 신체의 간략한 선과 배경의 여백은, 인물을 중심으로 전체적 구도를 잡게 하고 있다. 직전 작품들이 자연을 중심으로 보여주었다면, 지금은 인물 중심으로 꽃(자연)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다발의 꽃은 작가에게 주는 선물이며,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 축하의 꽃다발이다.

‘蕙苑愛`. 제목을 풀이하면, ‘혜초가 자라는 나랏동산 사랑`이란 뜻이다. 정원의 꽃들은 작가의 상상화(花)이다. 상상은 머리속으로 그려지는 새로운 세상이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있는 ‘작가가 사랑하는 정원’이다. 길들은 여백으로 처리되어, 그 길 위로 이리 저리 노니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 준다.

‘해탈의 문`. 담장 안에 수국이 활짝 피었다. 수국 핀 그곳에서 나올 수 있게 담장에는 손잡이를 달아 놓았다. 안과 밖의 경계는 막혀 있지 않고 언제라도 오고 갈 수 있다. 경계에 있는 손잡이는 해탈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는, 상징적 존재이다.

‘추억의 솔렌자라`, 작가의 추억 속에 있는 샹송을 모티브로 하여 제목을 붙였다. 노을 진 풍경이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가을과 어울리는 그림이다. 하늘과 바다에는 빨간 채색이 강렬하게 스며 있다. 한국화의 어떤 양식도, 기법도 설명이 필요치 않을 거 같다. 그저 바라보면 행복하다. 먹과 선묘의 쓰임이 자연스러워 사물이 불필요하게 의식되지 않는다. 전경에 보이는 다리는 인간과 자연을 연결해 주고 있으며, 작가와 자연은 서로 마주하고 있다.

‘하얀밤`, 달이 떠 있고, 은은하고, 아련한 달빛 아래 꽃이 피어 있다. 그리움인지…. 꽃은 달을 향해 몸을 돌리고 손짓하고 있다. 그림의 시상(時相)이 절로 떠오르게 만든다. 밤, 달빛, 꽃의 공기가 섞여 전체를 묘하게 감돌고 있다.

모두, 일상의 행복이며, ‘蕙苑愛`이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우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번 전시는 가볍고, 경쾌하다. 그동안 쉽게 다가오지 않았던 산을 오르고… 이젠, 산의 꼭대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온 작가의 발걸음이 가볍다. 자연의 햇살 아래 그네를 타고, 정원에는 작가가 사랑하는 꽃들이 피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