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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충북갤러리생성과 소멸의 시학
Exhib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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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okwa 2024040403
이용택, ‹Black Mokwa 2024040403›, 2024 21×29.7cm ,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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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okwa 2024040405
이용택, ‹Black Mokwa 2024040405›,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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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okwa 2024040411
이용택, ‹Black Mokwa 2024040411›, 2024 73.9×102.1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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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okwa 2024041001
이용택, ‹Black Mokwa 2024041001›, 2024 73.9×102.1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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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okwa 2024041002
이용택, ‹Black Mokwa 2024041002›, 2024 73.9×102.1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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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okwa 2024041004
이용택, ‹Black Mokwa 2024041004›,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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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y Mokwa 2024040413
이용택, ‹Grey Mokwa 2024040413›,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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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y Mokwa 2024040417
이용택, ‹Grey Mokwa 2024040417›,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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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Carnation 2024042202
이용택, ‹Pink Carnation 2024042202›, 2024 72.7×90.9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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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Carnation 2024042203
이용택, ‹Pink Carnation 2024042203›, 2024 79.7×112.2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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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Carnation 2024042205
이용택, ‹Pink Carnation 2024042205›, 2024 79.7×112.2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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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 Mokryeon 2024041102
이용택, ‹Withered Mokryeon 2024041102›,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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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 Mokryeon 2024041103
이용택, ‹Withered Mokryeon 2024041103›,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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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 Mokryeon 2024041105
이용택, ‹Withered Mokryeon 2024041105›,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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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 Mokryeon 2024041112
이용택, ‹Withered Mokryeon 2024041112›,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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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 Mokryeon 2024041132
이용택, ‹Withered Mokryeon 2024041132›,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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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 Mokryeon 2024041139
이용택, ‹Withered Mokryeon 2024041139›,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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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 Mokryeon 2024041141
이용택, ‹Withered Mokryeon 2024041141›,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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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 Mokryeon 2024041145
이용택, ‹Withered Mokryeon 2024041145›,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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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 Mokryeon 2024041162
이용택, ‹Withered Mokryeon 2024041162›,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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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 Mokryeon 2024041176
이용택, ‹Withered Mokryeon 2024041176›, 2024 21×29.7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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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carnation202400501
이용택, ‹witheredcarnation202400501›, 2024 210×210cm , mixed medium on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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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eredcarnation202400502
이용택, ‹witheredcarnation202400502›, 2024 210×210cm , mixed medium on paper
Review

생성과 소멸의 시학

한의정 (미학, 충북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


생과 죽음 사이에서

나의 생(生)의 출발점을 내가 기억할 수 없듯이, 나는 내 삶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증언할 수 없다. 내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죽음은 타자들의 죽음뿐이다. 그마저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소진해 가는 신체, 또는 소멸 후 남겨진 신체의 목격이 전부이다. 즉, 산 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포착할 수도 재현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죽음’은 산 자들에게 늘 일방적으로 말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너도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미술에서 ‘메멘토 모리’의 테마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나 전신 뼈의 모습으로 교회나 무덤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이것이 17세기에 이르면 우리네 삶의 장소로 공간을 옮겨와 ‘바니타스(Vanitas)’, 삶의 유한성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바니타스는 전도서 1장에 나오는 “Vanitas vanitatum, 헛되고 헛되도다”에서 유래된 용어로 특히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정물화 양식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인생의 향락과 허영(vanity)을 상징하는 꽃과 과일, 더 이상 연주되지 않는 악기, 깨지기 쉬운 유리, 삶의 유한함을 보여주는 모래시계,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등이 등장한다. 이 정물들은 모두 우리의 삶이 일시적이고 덧없고 허무(vain)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프랑스어로 정물화는 ‘nature morte’, 문자 그대로 ‘죽은 자연’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이용택의 <시든 목련(Withered Mokryeon)> 연작은 이러한 ‘자연의 죽음’으로 향하는 꽃잎들을 하나하나씩 떼어내어 주목한다.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수직 낙하 중인 이 꽃잎들은 아름답던 자신의 시절을 다하고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가며 말하는 듯하다. 생(生)의 아름다움도, 영화로움도 다 한때요, 사실 당신도 마지막을 향해 시들어가고 있는 중 임을 잊지 말라고. 이용택의 목련 작업은 과거의 바니타스 회화처럼 많은 죽어가는 자연과 사물을 쌓아놓는 대신, 떨어질 때에야 혼자가 되는 목련 꽃잎을 거대하게 클로즈업하여 하나의 프레임에 담는다. 그리고 이들을 따로 또 같이 한데 모아놓아 꽃잎들의 목소리가 장엄한 장송곡으로 들리게 하는 이 시대의 바니타스이다.

한편, 그의 꽃잎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체로서 기능한다. 영어의 정물화, ‘still life’가 고요하더라도 아직 살아 있음을 강조하듯 말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색이 군데군데 번져나가고 있음에도 꽃잎들은 여전히 생명의 물기를 머금고 있고, 꼿꼿이 서 있다. 고대로부터 어떤 대상의 이미지를 눕히지 않고 수직으로 그리는 것은, 그 대상이 눕지 않고 서 있기를,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기를 바라는 염원의 표현이다. 빅토르 I. 스토이치타, 『그림자의 짧은 역사: 회화의 탄생에서 사진의 시대까지』, 이윤희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6, p.21
현실의 목련 꽃은 1년을 기다려 겨우 일주일 피었다 지지만, 작가의 눈에 포착되어 작가의 손길을 입은 이 꽃잎들은 영원의 시공간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용택이 30년 전 동양화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동양의 정물화에 대해서도 언급해 볼 만하다. 동양의 정물화라면 19세기 중반 오원 장승업에 의해 하나의 장르가 된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를 떠올릴 수 있다. 기명절지도는 서양의 바니타스와는 정반대로 부귀, 장수를 기원하는 길상적(吉祥的) 의미를 지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 외에도 정물대나 특정한 배경 설정 없이 정물을 작가의 주관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용택의 꽃과 열매도 특정 공간이라 지칭할 수 없는 곳에 덩그러니 떠 있다. 동양의 무(無), 허(虛), 공(空)의 공간이자, “유(有)는 무(無)에서 생겨나고, 실(實)은 허(虛)에서 나온다.”는 동양미학의 반영이다. 현실세계에서 시들어 가던 생(生)들은 한지 위 텅 빈 가상의 공간으로 이주해 오면, 어느 한 곳에도 매이지 않는 이동과 부유(浮游)의 자유를 얻은 듯 존재감을 드러내며 우리의 눈앞에 떠 오른다.


선(線)으로 그리고 쓰기

<분홍 카네이션(Pink Carnation)>, <검은 모과(Black Mokwa)> 연작에서는 이 가상의 공간 속에 카메라가 포착한 순간의 이미지와 손으로 그려낸 드로잉 선들과의 만남을 보여준다. 오래전부터 작가는 원초적이고 즉흥적인 선과 기호, 색면으로 화폭에 추상적인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해왔다. 꽃과 열매와 만나고 있는 이 드로잉 선들도 이 프레임 안에 ‘이미’ 존재했던 다른 무언가의 흔적들일지 모른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해체론에서 정의하는 ‘나’는 나 이전에 타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했다. 이를 “태초에 잔해가 있었다.”고 표현하며 데리다는 ‘나’의 기원이 ‘나 이전의 타자와의 만남’이라고 본다. Jacques Derrida, Mémoires d’aveugle: l’autoportrait et autres ruines, Paris: RMN, 1990, p. 69.
이러한 타자와의 만남이 기록되는 곳이 바로 그림인 것이다.

여기서 ‘잔해’란, 전통 형이상학에서 주체라는 프레임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타자성의 흔적을 뜻한다. 잔해는 사건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오히려 이 잔해가 진정한 ‘나’를 가능하게 한다. 분홍 카네이션, 검은 모과가 프레임 안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프레임 안에 이미 존재했었고 사라져가는 다른 존재들의 흔적과 만나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 현존의 순간은 그리기의 과정에서 선물처럼 주어지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현존을 프레임으로 완전히 고정화하려는 순간, 그 현존은 다시 흩어질 것이다. 드로잉 선과 점, 색면, 그림자, 번짐으로 남아 있는 잔해는 현존을 위해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가야 할 부스러기가 아니라, 프레임 안과 밖을 넘나들며 현존을 가능케 하는 타자의 흔적들이다.

이렇듯 이용택의 연작에서 프레임은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면서 존재를 가능케 한 타자와의 만남을 가시화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존재를 만들기도 하고, 존재를 해체하여 분리된 단면을 나열하기도 한다. 이용택 작품의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는 또 다른 종류의 흔적이 있는데, 바로 연필로 흐리게 쓰여진 작품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 서명이다. 그리스어로 작품을 뜻하는 ‘에르곤(ergon)’에 비하면, 액자 프레임, 제목, 서명과 같이 에르곤에 덧붙여져 있는 ‘파레르곤(parergon)’은 오랫동안 부차적인 것, 장식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러한 파레르곤들이 오히려 에르곤이 될 수 있음을, 에르곤의 의미를 고정시키지 않고 무한 확장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Jacques Derrida, La Vérité en Peinture, Paris: Flammarion, 1978 참고.
이용택의 작품에서 현존을 뽐내며 부상하는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 아래 부드럽게 흘러가며 사라져가는 ‘텍스트’들은 이러한 에르곤과 파레르곤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미지와 텍스트는 타자의 흔적을 남긴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는 이미지를 그리는 행위와 글을 쓰는 행위가 ‘선(線)’을 새기는 같은 동작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것을 프랑스어의 ‘trait’에서 기인하는 행위라고 설명하는데, trait는 선, 줄, 줄긋기, 윤곽, 특징과 같은 여러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즉 선으로 쓰고, 선으로 그리며 –여기에는 빛(photo)으로 쓰는(graphein) 사진(photography)도 포함된다– 서명을 더하는 행위는 이용택에게 모두 똑같이 화폭에 존재를 새기는 행위이다. 그러나 한번은 그리기로, 한번은 글쓰기로 반복한다고 해서 현존을 두 번 강조하는 동어반복적인 행위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는 그리기도 글쓰기도 흐리게 하고, 사라지게 하고, 흘려버림으로써, 생성되면서 동시에 지워지는 과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시간-이미지’를 현시하기 위해서

회화나 조각은 일정한 공간을 구성함으로써 형상화를 이루고, 공간을 점유하기 때문에 공간예술에 속한다. 미술이 주로 정지된 순간을 담지만, 미술의 역사에서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또는 연속적으로 담으려는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미술이 디지털 매체를 적극 활용하게 되면서 어느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고 ‘지속’하는 시간을 반영하는 방법은 다양해졌다. 현대미술은 시간을 드러내기 위해 키네틱 아트나 퍼포먼스 아트처럼 실제로 움직이기도 하고, 비디오 아트나 미디어 아트에서처럼 움직이는 환영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프로세스 아트처럼 결과물보다 변화하는 재료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각각의 작품에서 시간은 파편화되거나, 실제시간(real time)에 맞추어, 또는 시간의 리듬을 변화시키거나, 과거를 재방문하거나 끝없음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그러나 이용택이 시간을 현시하는 방법은 이러한 시간의 구조화 방식과는 다르다. 필자는 그의 시간 현시 방법을 대상에 잠재되어 있는 이미지를 현실 이미지와 굳게 고착시키는 결정화(結晶化) 방식이라 칭하고자 한다.

변화와 생성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시간을 단순히 순간의 연속이 아닌 ‘지속(durée)’의 연속으로 바라보았다. 베르그송의 시간은 순차적 시간이 아닌 주관적인 시간, 즉 의식의 흐름을 통해 잠재된 기억이 비의도적으로 마주친 과거와 현재가 동시성을 갖는 시간이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이미지’이다. 외부의 사물은 공간적인 것이지만 우리의 의식에서 이미지화되면 그것은 시간의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탁상시계에서 시간을 본다면 그것은 현실적 이미지이지만, 시계에서 그것을 선물했던 옛 친구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과거 속으로, 또는 그것에 담긴 잠재적 이미지와 마주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러한 베르그송의 시간과 이미지 개념을 전유하여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와 새로운 사유 방식에 의한 ‘사유-이미지’를 생산하는 현대 영화이론을 전개한다. 질 들뢰즈, 『시네마 II: 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 언어, 2005 참고.
여기서 들뢰즈는 잠재적 이미지의 다양한 층위들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예를 들어 지난 일을 회상하는 ‘회상-이미지’, 욕망이 드러나는 ‘꿈-이미지’, 꿈이 외면화되어 환경이 춤추고 운동하는 ‘세계-이미지’에서 잠재적 이미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정확히 말해 순수한 잠재적 이미지가 아니라 현재와 관련되어 현실화되고 있는 잠재적 이미지들이다. 이런 것들과는 다른, 가장 순수한 상태의 잠재적 이미지를 들뢰즈는 ‘결정-이미지(image-cristal)’라고 부른다.

결정-이미지에서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는 식별 불가능하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현실적 이미지 역시 잠재적 이미지와 같은 수준에서 대상의 다양한 면모를 표현하는 하나의 부분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다양한 색과 형상으로 표현되어 하나하나 분리된 꽃잎들이 현실적 이미지라면, 현실적 이미지가 그것의 잠재적 이미지와 합착되어 분리될 수 없도록 결정화된 <회색 모과(Grey Mokwa)>와 <검은 모과(Black Mokwa)>는 ‘결정-이미지’의 형상으로 우리 앞에 선보인다. 현실세계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썩어가고 있는 중인 모과의 한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이지만, 여기에는 모과의 잠재적 이미지가 수없이 겹쳐져 압착되어 있다.

이것이 시간-이미지의 왕좌를 차지하는 이유는 이 이미지가 현재와 과거의 공존관계라는 가장 근본적인 시간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정-이미지가 보여주는 시간의 작동방식은 ‘지나가는 현재’와 ‘보존하는 과거’라는 구별되는 두 가지 흐름이다. 이 두 흐름 가운데 ‘지나가는 현재’는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향해 질주하며 ‘죽음의 춤(dance macabre)’을 춘다. 반면 ‘보존하는 과거’는 자신의 고유한 과거와 심연으로 결합하면서 구원과 탈주의 가능성, 즉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잿빛으로 썩어가는 모과가 마치 거기에서 무엇이든 분화되어 태어날 수 있는 생명을 품은 ‘알’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용택의 결정-이미지에서 등장하는 검은색은 단순히 죽음, 암흑, 부정을 의미하는 색이 아니다.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의 추상회화에 나타나는 검은색처럼, 그것은 빛이 결여된 상태가 아니라, 빛 이상의 빛, 검은색을 넘어서는 검은색(outrenoir)이다. 우주의 블랙홀처럼 모든 가능성이 탄생하는 장소이자, “무한하게 복합적인 열린 관계의 그물망”이 펼쳐지는 곳이다. 알랭 바디우, 『검은색: 무색의 섬광들』, 박성훈 옮김, 민음사, 2020, p. 55.
관객이 작고 느린 보폭으로 이동하며 이 검은 심연을 응시하면, 검은색 이면에 잠재된 수많은 빛의 파장을 만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매순간 변하는 빛을 초월적인 빛으로 바꾸는 이용택의 작업에 동참하게 된다. 작가가 쉼 없이 화폭이라는 시공간 위에 분화, 응축하고 있는 선과 색, 그리기와 글쓰기, 생성과 소멸의 교차를 발견하면서 우리는 이 무한성의 일부를 풀어내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