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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충북갤러리빛 - 남한강의 바람
Artist' note

남한강과 예석(수석) 그리고 회화(그림)
우리나라 제일의 수석 산지는 중심고을 남한강변으로 전한다.
강이 일부 수몰되기 전 1970 년代의 경기고 교직 동료 탐석팀 8인과
단양 하산 이란 곳에 이르러 小돼지 모양의 까만 돌이 햇빛을
받아 강물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진오석은 볕을 받으면 빛난다.
가을인데 그날 내가 막걸리를 쏜 것 같다.
많이 애착하는 보석도 원래 돌인데 가공했
을 뿐이다.
수 억년 동안 결정화된 돌을 인간만이
관심을 갖는 거다.
오히려 예석은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긴 세월에 걸쳐 '자연'이 만든 자연스러운
작품이고 보석보다 크니 얼마나 더 귀한가?
미술 작품은 입체와 평면이 있는데 소극적
일 수 있는 평면이 아니어서 더 좋다.
我는 평면이지만 ‘예석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모든게 모자란다고 한탄을
할 때가 많다.
경영학자인 황의록(KAF 이사장)님께서
‘그림 한 점이 세상을 따뜻하게 바꾼다’고
한 것을 보면 남한강의 더 자연스러운 예석
은 인간 삶속에 영생할 것 같다. 一生一石이라...
단단하고 색이 변치않고 항상 그 자리에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추상화 같은 회화를 그리워해 본다.

- 작가 노트

About

신범승(辛範承)의 회화(繪畵)에 대하여 -
신범승, 그 동안 그는 각종 단체전에 꾸준히 출품에 왔으며 그것이 그의 작가적 성
장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바로 그 결실이 이 역시 지금으
로서는 먼 옛날이 되어버린 1978년에 창설된 「제1회 중앙미술대전」에서의 서양화
부문의 장려상 수상이다.
장려상이라고는 하나 사실은 대상 수상작이 없었기에 실질적으로 그 상은 대상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또한 네 사람의 장려상 수상자 가운데 신범
승만이 유일한 구상계열의 화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수상이 그의 중앙화단 진출의
발판이 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의 특선 3회라는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며, 마침내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는 하나 1992 미술대전에
서 대상(大賞)을 수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 동안의 추상미술 편중의 우리 나
라 미술 풍토를 감안할 때 특기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신범승의 회화 세계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구상적(具象的)」(또는「형상적(形相
的)」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그러나 어름잡아 30년 안팎의 화력에도 불구하고 신범승은 건실한 「사실적」 세
계와 보다 자유로운 「구상적」세계 사이을 부단히 오가고 있는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개인전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그는 이 양
자 사이를 그의 작가로서의 경력 또는 연대와는 상관없이 오가고 있는 것이다.
풍경화의 경우 거의가 남한강 주변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어쩌면 그 풍토적인 특
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풍경화는 「인상파 풍」(印象派 風) 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풍경 자체가 경쾌하고 재빠른 필치에 의해 하나의 전체로서 포착되고 있으며,
이는 다시 말해서 대상의 디테일이 생략되고 있음과 함께 일체의 묘사적인 요소가 자
취를 감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 대신 화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 그것은 신선하고
해맑은 햇볕의 넘실거리며, 이는 곧 이 화가의 자연과의 새로운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 기도 하다.
인물화에 있어서도 그 기본적인 수법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 인물화는 그것
이 초상화이는 누드이든 사실적인 대상 묘사를 지양하고 있으며 주변 또는 배경의 정
황 설정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정감적(情感的)인 인
물화라 할 수 있을 것이 그와 같은 대상 접근이 또한 신범승의 끊임없는 변신(變身)의
시도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소박한 필치라고 했으나 그 소박성 바탕에는 이 화가의 보다 밀도있는 기량이 깔려
있는 것이다. 화면 공간 차리에 있어서의 흔들림 없는 견실한 구도(構圖)와 그것을 뒷
받침하는 색채화 된 농숙한 마티에르 구사 등이 그것이다. 뿐만아니라 「회고적」이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감각적인 현실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상상 공간을
지닌 세계, 요컨대 내면화된 비전의 세계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신범승의 사실적
회화 세계는 표현주의적 세계에도 접근해 가는 것이다.
한편 인상주의적 세계의 경우, 이 회화세계는 그 미학적 원리로 볼 때 사실주의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동시에 그 인상주의는 특히 모네의 만년의 작품이 보여주고 있
듯이 사실주의의 극한점과 그 한계에 도달하여 끝내는 비사실적, 비대상적(非對象
的) 회화 세계에 귀착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적이든 비
사실적인 것이든 인상주의적 회화 세계에 있어 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자연에 대한
「인상」 다시 말해서 자연에 대한 시각(비전)에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자연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범승의 인상주의적 세계도 이에 준하거니와. 그것을 두고
「현장성(現場性)」과 「즉각성(卽刻)性)」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것은 또한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앞서 든 윤진섭의 글에서도 지적되
고 있듯이, 근자에 와서 신범승은 부쩍 야외 사생에 정열을 쏟고 있는바. 그 풍경화
연작(連作)은 「매우 밝고 경쾌하며, 미끄러지는 듯한 운필의 특징적인 화풍을 지니
고 있다. 강가나 산야, 들판, 교외의 마을 등을 소재로 선택하여 현장에서 완성되는
그의 풍경화들은 대상을 접했을 때의 순간적인 인상이 화면에 잘 형상화되어 나타나
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자연에 대한 신선한
생동감이다.
이와 같은 인상주의적 화풍과는 달리 또 다른 한편에서 신범승은 감각적이자 즉각
적인 인상 넘어의 또 다른 세계. 즉, 대상 세계의 「심상화(心象化)」라 할 수 있는 회
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회화의 첫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실적 세계」에 대해
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그 사실적 화풍에서도 이미 향수어린 서민적 정감이 낭만주의
적 회상 속에 되살아나고 있는 듯이. 보이거니와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연의 재현(再現:reprosentation)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보다 자유로운
「재생적(再生的:reproduction)」 접근이다. 그리고 이를 두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주의적 세계라 부른다.
「표현주의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사실적 세계와는 거리가 먼 비사실적 성향의 것이다. 하기는 그와 같은 성향은 비교적 초기의 <투계도>라든가 해학적 풍속화
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리고 그것이 일련의 풍경화에 있어 보다 대
담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같은 <남한강 변>이라는 풍경, 보다 넓게
는 자연이라고 하는 대상이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듯한 양상의 것으
로 변하고, 색채 또한 뉘앙스에 찬 색조의 변주가 아니라 비대상적인 격한 색채 그 자
체의 표현성을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물화 또는 누드에 있어서도 형태에 있
어서의 과격한 형태왜곡(데포르마송)과 함께 그 포즈 또는 표정이 때로는 육감적이랄
수도 있는 여성 특유의 체취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실(寫實)과 구상, 더 나아가서는 구상과 비구상의 한계마저 애매해진 시
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구상 대(對) 비구상이라는 공식화 내지는 규범화된 이분법(二
分法)이 지양된지 이미 오래인 이시점, 다시 말해서 미술 경향이 다변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요망되는 것, 그것은 바로 개성(個性)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개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한 작가가 타고 난 기질의 문제가 아닌가도
생각된다. 문제는 그 기질에 얼마만큼 충실하느냐에 있을 것이며 거기에 따라 갖가지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충실하다는 것, 그것은 또한 어떤 유
파라든가 시류(時流)에 초연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이란 필경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과의 만남의 마당이다. 그리고 자연이라
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방관자로서 바라보는 자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체험적
삶의 현장으로서의 자연이다. 신범승은 바로 그 현장에 스스로의 몸을 내어 던지며
거기에 몰입(沒入)하는 화가이다.
-제5회 신범승 展 (1994. 10. 광화문 서울갤러리 全館) 작가론 발췌-

Exhibitions
1 / 5
남한강의 축배
신범승, ‹남한강의 축배›, 53x78cm , Oil Painting
2 / 5
단양의 아침_물줄기는 왜 아래로 떨어져 가는가
신범승, ‹단양의 아침_물줄기는 왜 아래로 떨어져 가는가›, 72.7×60.6cm , Oil painting
3 / 5
연인과 예석장수이야기
신범승, ‹연인과 예석장수이야기›, 2012 210x300cm , 2012
4 / 5
월광도_고향가는 길
신범승, ‹월광도_고향가는 길›, 2022 53×78cm , Oil painting
5 / 5
조용한 아침의 나라 추석, Oil painting, 51×76cm, 2017
신범승, ‹조용한 아침의 나라 추석, Oil painting, 51×76cm, 2017›, 2017 51×76cm , Oil painting
Review

마르지 않는 영감의 강
이 선 영 (미술평론가)

서울 충북갤러리에서 전시하는 화가 신범승(b.1942-)교수의 작품은 경기권과 충
청권을 잇는 강줄기를 주요 소재로 삼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19년 예술의 전
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제목이 ‘중심 고을 충주 남한강 풍정圖’인 것을
보면, 지역에 대한 작가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남한강물에
멱감으며 철이 들었고’, ‘1960년대부터 강변을 서성거리며 1987년에 생긴 향토 전
시인 남한강 전’에 계속 참여했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 ‘빛-남한강의 바람’에서 작
가는 작품의 주요 소재지인 충주를 ‘풍광(風光) 좋은 남한강, 중원문화의 본산인
중심 고을’이라고 평가했다. 이 전시뿐 아니라 그의 대표작들이 거의 남한강과 관련
된 풍경이다. 그는 남한강에서 퍼도퍼도 마르지 않는 예술적 영감을 길어낸 것이다.
충주에 방문했을 때, 산과 물이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곳에 거주하며 작업하
는 이들이 그 지역의 중요한 자산을 놓치지 않음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작가는 그것이 옆에 있었을 때 잘 모르다가 오랜 외국 생활을 통해 고향을 재
발견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행복의 파랑새’처럼 가까이 있는 것의 진면목을 깨닫
기 쉽지 않다. 한반도에서 충청 내륙 지역은 바다와 접하지 않기 때문에, 강이나 호수
가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해왔을 것이다. 80대의 노장 신범승은 올해 38회째 미술단
체 ‘남한강 전’에 빠짐없이 참여해 온 창립멤버이자 주요 멤버이기도 하다. 한국화
단에 많은 미술단체가 있지만, 한해도 거르지 않고 그룹 전시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말 그대로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왔다. 남한강은 신범승 뿐
만 아니라 그와 오랫동안 함께 해 왔던 지역의 작가들에게도 영감과 예술적 실천의
원천이 되어준 것이다. 자연이라는 실재는 거듭되는 해석을 통해서 더욱 풍부해진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만큼이나 역사적인 존재이다.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에서 ‘우리가 현실을 일반 적인 것에 대하여 고찰하면 그것은 자연이 된다. 우리
가 현실을 특수하거나 개별적인 것에 대하여 고찰하면 그것은 역사가 된다’고 인용한
다.
장 그르니에도 [일상적 삶]에서 자연과 역사를 대립시킨다. 그에 의하면 자연 속에
있는 사물들은 무한히 반복된다. 하지만 역사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드러낸다.
이처럼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역사와 자연의 차이를 구별하려고 했지만, 현실의 역사
는 근본적 새로움보다는 가짜 새로움이 득세한다. 진보와 발전의 구별이 모호해지면
서 역사는 역사주의로 매몰되기도 하고,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 추구되기도 한다.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예술에서 더욱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어떤 작가들에게
는 자연이 새로움의 원천이 되었다. 미술사에서 그 대표적인 유파는 인상주의였다. 남
한강을 끼고 함께 해온 작가들의 오랜 동지적 실천은 강가를 중심으로 문명은 발달
하지만, 물질적 문명과 정신적 문화와의 상관관계는 자명하다. 또한 신범승은 또한
한국 수채화 작가협회를 이끌어왔다. 그에게 물은 작품 소재로도 작품 형식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그린 강은 맑고 투명한 수채화의 형식과 잘 어울린다.
화단에서 작품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지속성과 대표성을 가져온 셈이다. 물론 유
화 작품도 많이 발표했지만, 그의 대표적인 매체는 수채화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는 요즘 화단에서 단절을 더 많이 느낀다. 그것은 그가 막힘없이 흘러야 하는 강으로
부터 영감을 얻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강은 한반도 전체를 타고 흐르지만, 이제
민족, 통일 같은 이슈는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함께 가는 흐름이 아닌
섬같은 고립은 단지 작업과 관련된 차원은 아니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또는 사람과 역사가 아닌 사람과 기계의 연결이 더 보편화된 탓이다. 사람들은 이러
한 연결에 더 익숙하고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적응해야만 한다. 우리의 일상에 편재
한 고립적 상황은 그가 전시를 통해 펼치는 따스한 인간의 세계, 자연과의 교감을 자
아내는 풍경이 가지는 의미를 말해준다. 한편 기후 위기를 비롯해서 지구가 받는 압
력은 그의 풍경들을 현실이 아닌 유토피아처럼 보이게도 한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 않은가. 300호 크기의 대작
3점이 출품되는 이번 전시의 부제 ‘빛-남한강의 바람’에서 ‘바람’은 동음이의
어 유희로 ‘wind’와 ‘hope’를 동시에 포함한다. 그의 전시 부제인 ‘바람’이나
‘희망’에는 자연적 실재의 충만함보다는 부재가 깔려있다. 그는 자연을 둘러싼 서
사, 즉 신화에도 관심을 가진다. 인간은 의식(儀式)을 통해서 다시금 충만했던 그때
그곳으로 회귀하려는 신화에 대한 욕망이 있다. 근본적 시공간으로의 회귀를 통해 인
간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예술은 신화나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그것은 단절이
아닌 포함이다. 예술은 단절되었던 것을 잇는 것이며 여기에 예술의 장점과 단점이 존
재한다. 당위(단절된 것을 이어야 한다)와 현실(단편화를 극복하기 힘들다)의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신범승의 작품에서 강안팎의 풍경과 인간은 자연과 덜
적대적이었던 시대를 느낄 수 있다.
그가 종이 위에 수채물감으로 그린 강은 맑디 맑지만, 이제 자연은 영원
히 변하지 않는 진리 같은 실재가 아니다. 얼마 전 뉴스에는 붉게 흐르는
강의 사진과 함께 ‘깨끗하고 투명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 서북단 알래스
카의 강 수십 개가 마치 녹을 푼 듯한 주황빛으로 변모해 우려를 사고 있
다.’(서울=연합뉴스)는 소식을 전한다, ‘이런 산화변색(rusting) 현상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영구 동토 해빙으로 초래됐을 수 있다’고 분석됐다.
언뜻 보면 붉은 빛이 반사된듯한 녹슨 물들이 생태계에 미칠 파장은 가늠
하기도 힘들 것이다. 사정은 바다도 마찬가지여서, 현재 바닷물이 뜨거워
져서 전 세계 산호초의 2/3가 백화현상을 보인다는 암울한 생태 리포트도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소식은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자
연이라는 위안과 평온의 장소가 이제 염려와 불안, 그리고 트라우마의 장
소가 된다. 하늘빛을 반사하는 맑은 강 위에 띄워진 옛스러운 배가 있는
작품 [남한강 기행]은 이전 시대와 다를 바 없이 흐르고 있을 오래된 자연
의 무대를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현대 그곳의 모습 또한 적극적으로 집어넣는다. 유화 작품
[남한강에 뜬 해를 보고, 또 보고]는 작가로 추정되는 화구를 어깨에 맨
사람이 충주의 특산품인 사과를 들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사과는 화면
중앙의 해와 비슷하다. 떨어지는 사과로 만유인력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는 과학계의 신화처럼, 그의 작품 속 자연에는 한 알의 사과부터 태양계의
중심인 태양까지 동일한 보편적 질서를 따른다. 강 주변에는 문화재, 태권
도 등 충주와 관련된 여러 문화적 코드들을 여기저기에 박아 놓았다. 현대
인이 어딘가에 여행을 갈 때 그곳의 자연과 문화재는 제 1의 동인이 된다.
신범승의 강은 문명의 젖줄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자연은 문명의 든든한
토대가 되어왔는데, 인간중심의 시대인 ‘인류세’에 위협받고 있다. 우리
는 이제 늘 불길한 사건으로만 자연을 접한다. 강은 바다를 향한다는 자명
한 사실은 그가 바다 풍경도 함께 그리게 됨을 알려준다.
작품 [新 아침 바다]는 바다와 섬이 등장하는데, 이편의 돌무더기는 매
우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비슷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졌을 저편의 섬
은 아스라한 색으로 칠해진다. 늘 여기가 아닌 저기를 꿈꾸는 인간의 모습
이다. 작가는 천혜의 자연풍경을 최대한 반영하지만, 매체의 속성도 존중
한다. 요컨대 그는 아름다운 풍광을 그저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하지 않는
다. 그리다 만듯 칠하다 만듯 여백을 풍부하게 준 작품도 있다. 관객에게
여백은 사실주의가 제공하지 못하는 도약과 비약이 일어날 수 있는 상상
의 자리다. 고정된 형식인 그림에서 잠재적인 운동이 일어나는 장이다. 그
렇다고 자연이라는 지시대상과 절연된 완전한 추상도 아니다. 추상에 관련 된 한 이론은 예술가가 그가 속한 환경과 우호적일수록 사실주의에 기울고, 적대적일
수록 추상화 된다고도 말한다. 이때 추상은 현실도피와 초월 사이의 어디엔가에 존
재한다. [추상과 감정이입](보링거)의 이론에 의거하면, 신범승은 남한강에 ‘감정이
입’이 되어 있는 셈이다. 그에게 땅과 물은 어머니와 다름없다. 40년 가까이 어떤 지
역의 이름을 딴 활동을 해온 작가에게 그곳은 떼어낼 수 없는 몸의 일부이다. 그래서
인지 강을 무대로 한 분단의 광경은 더욱 우울하다. 작품 [간월도에서]에서 작가는 물
을 잔뜩 머금은 붓질의 흔적을 화면에 그대로 남겼다. 물로 물을 표현하는 작품은 세
상을 투명하게 비추는 창이 아니라, 매체의 특성을 개입시킨다. 작품 [남한강변 따라]
에서 강물은 물감이 되어 화면 아래로 줄줄 흘러내린다. 수평으로 흘러가야 할 강물
을 아래로 떨어뜨린 감정의 무게가 느껴진다. 세상을 그럴듯하게 베껴내는 환영, 그것
을 만들어내는 중성적 매체가 아니라 중력의 작용을 받는 물감은 멜랑콜리하다. 신범
승의 작품에서 강이라는 소재와 분리불가능한 것이 바로 빛이다. 빛을 받는 강은 3차
원의 물리적 속성을 초월하는 환상적인 장면으로 도약한다. 이번 전시에서 강과 더불어
중요하게 다루어진 빛이라는 키워드는 자연의 보편적 질서를 상징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형이상학의 역사는 더 이상 소재
적인 맥락으로는 포괄될 수 없는 궁극적인 주체를 가리키는 적절한 준거를 확보하기
위해 빛의 은유가 지니는 특징을 활용해 왔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빛이 충만할 때
빛은 진리가 출현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명약관화한 명백함을 창조한다. 한스 블루멘
베르크는 빛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원론적 세계관에 속했다고 하면서, 마치 불과 흙처
럼 빛과 어둠은 근본적이고 원형적인 진리라고 말한다. 화가 신범승 교수의 작품 [남
한강의 빛]에서 강을 둘러싼 주요한 빛은 해와 달이다. 같은 강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오래된 격언도 있지만, 흐름이라는 현상은 영원할 것이라는 작가의 예감은 우
주적 현상과 관련된 빛과의 유대로 나타난다. 강 안팎의 사람들은 낚시한다. 이 또한
물에서 생명이 태어난 이후의 역사 동안 행해져 왔던 일이다. 작품 속 인간들은 동양
화 속의 인간처럼 작다. 그들은 근대적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듯이, 자연의 주인이 아
니라 자연에 속해있다. 그의 작품은 진정한 풍요와 평화가 자연의 섭리를 따를 때 가
능함을 알려준다. -